통번역의 역사와 그 시작
번역기를 사용하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번역기가 없는 시절에는, 더 이전으로 올라가 전문 통번역사가 생겨나기 전에는, 사람들은 어떻게 소통했을까? 이 질문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성경의 바벨탑 사건이 떠오릅니다. 영화나 소설로도 많이 등장하는 바벨탑 사건은 아주 먼 옛날 인간이 신처럼 높아지기 위해 바벨탑을 쌓았고, 바벨탑을 쌓는 인간들을 본 신이 분노하여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인간의 언어를 여러 개로 흩어 놓았다는 그런이야기입니다. 이를 계기로 인간은 세상 곳곳에 흩어지고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됐다는 설(說)이죠.
이 이야기를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오래전부터 인간의 언어는 민족과 지역, 국가별로 천차만별이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언어 간의 효과적인 소통을 위해서는 반드시 통번역을 요구했지요. 관련 사료를 찾아보니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통역이라는 직업이 매춘(몸을 파는 행위)과 함께 전체 직업군중에서도 무척 오래된 편에 속하는 직업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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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차통역과 동시통역의 역사
순차통역의 모태인 외교통역 중 ‘회의통역’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17년 베르사이유 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협상 석상이었습니다. 미국과 영국의 대표단 중 일부가 당시 국제 외교 언어였던 프랑스어를 할 줄 몰랐기 때문에, 두 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 통역사를 활용하게 된 것이 통역의 시작이라고 ‘통역 현대사’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후 회의나 공식적인 회동에서 통역사가 연사의 말이 끝난 후 일인칭으로 통역하는 순차통역의 방식이 이용되었다고 하는데, 특히 국제연합의 전신인 국제연맹에서 이 순차통역의 방식이 많이 사용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반면 동시통역은 2차 대전 후에 전범재판을 위한 뉘른베르그 법정에서 처음 등장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유엔총회의 회의 내용을 라디오로 생중계하면서 동시통역은 점차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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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관점에서 <번역사 오디세이, 쓰지유미, 2008> 라는 책에서는 번역의 역사를 이슬람교가 생기고 스페인 전역과 파키스탄, 아시아까지 그 영토를 넓힌 이슬람제국의 관점에서 볼 때, 초기 이슬람교도들이 정복활동을 통해 건설한 우마위야왕조(661~750)부터 번역이 시작되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책의 내용 중에서 유럽인은 고대 그리스의 지적 유산을 직접 계승한 것이 아니고, 아테네를 중심으로 발전한 그리스 문화에서 알렉산드리아 헬레니즘으로 계승된 지적 문화유산은 아랍어로 번역되어 바드라드라는 새로운 중심지에서 그 생명을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마위야 왕조는 바그다드에서 떠나 지금의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다시 시작하는데, 후에 바그다드와 코르도바는 그 당시 세계적인 학술중심지로 성장했고, 이 책에서는 이것에 번역의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통번역의 기원은 다양하게 존재하지요.
우리나라 통역의 역사
우리나라의 경우, 통역 교육기관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충렬왕이 1275년 통문관을 개편하여 사역원이라는 교육 기관을 만들었는데, 이 사역원은 번역과 통역에 관한 연구는 물론 교육까지 담당하는 기관이었습니다. 고려는 또한 오늘날 비교적 잘 알려진 ‘역관’이라는 담당관리를 두었습니다. 역관은 고려뿐 아니라 조선시대에까지 존재했던, 통역과 번역 업무를 담당했던 관리를 말합니다. 고려나 조선 둘 다 이웃 나라들과의 교섭이 빈번했기 때문에 ‘역관’을 두고 외국어를 연구하고 교육했습니다. 역관이 없는 부득이한 경우엔 한문을 이용해서 필담을 나누기도 했지만, 필담의 한계가 분명히 있었으므로 외국어 전문가인 역관의 중요성은 매우 컸습니다. 초기에는 서민 출신이 임명되었으나 후기에는 양반 계급의 사람들도 통문관을 통해 학습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합니다. 역관이 되는 것이 일종의 출세 지름길로 여겨지기도 했지요.
조선시대에는 사역원과 승문원을 통해 외국어학습을 장려하였습니다. 사역원에서는 당시 4대 외국어인 한어, 몽골어, 청어, 왜어를 가르쳤습니다. 통역사 양성은 조선시대에도 계속되어 1393년 태조시기에 사역원을 설치하여 번역, 통역에 관한 교육을 담당하도록 했습니다. 처음에는 한학만을 통/번역의 대상으로 했으나 점차 몽골어, 일본어, 여진어를 개설하여 총 4종의 언어를 관장하는 기관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지도 선생은 31명이었으며 한학생도 35명, 몽고어를 하는 몽학생도 10명, 일어를 하는 왜학생도 15명, 여진학생도 20명 등 총 80명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31명의 교사가 80명의 학생을 지도했으니 과거에도 나름 그룹과외 교육이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과거에는 구전으로 외국어학습이 이루어졌는데, 1800~1900년대 조선시대 사료를 보면, 당시 조선인들의 영어실력이 꽤 수준급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는 문법을 위주로 배우기보다, 원어민들이 직접와서 프리토킹을 하는 식으로 수업이 진행됐습니다. 실무에 쓸 수 있어야하다보니 실용영어를 가르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일본인 관리였던 시노부 준페이(1901)는 <한반도>라는 자신의 책에 “조선 사람은 동양에서 가장 뛰어난 어학자로 중국인이나 일본인은 감히 따르지 못할 것이다”고 적어놓았을 정도니까 지금의 영어울렁증을 가진 많은 수의 한국인보다 영어를 더 수려하게 구사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다만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말하기 중심의 교육이 오늘날 우세한 영어 교육인 작문과 문법위주로 바뀌었고, 이에 따라 조선인의 영어실력에 대한 평가도 다시 달라졌다고 하니, 이 시기의 영향이 지금까지 영향을 준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크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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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은 말로, 번역은 글로써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바꿔주는 작업을 말합니다. 한자를 땅에다 적어서 필담이라는 형태로 소통했던 어려움과 답답함을 넘어, 역관을 두어 전문적인 통번역사가 양성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는 기계번역의 고도화로 인해 통번역의 역사에 사람이 아닌 기계가 점점 자리하고 있는 추세지만, 앞으로 발전하는 기계번역의 괄목할 성장에 인간은 어떻게 마주하고 살아남아 역사 페이지의 한 켠을 자리하게 될지 통번역의 미래가 궁금해집니다.
그럼, 다음 포스팅에서 만나요
참고
#1, #2 <외국어와 통번역> 최정화 (2005)
#3 <일제강점기의 조선 생활상> 영국인 헨리 버지스 드레이크 (1930)
*해당 콘텐츠는 지콘스튜디오에서 레터웍스로 이관되었습니다.